달콤하게 평범하게

우진이 수정의 전화를 받은 건 오세연의 뺑소니사고 공판준비로 바쁠 때였다. 그 사이 대휘와는 통화 한 번, 톡 한 번 못했다. 괜찮아? 이 세 글자를 못 보내고 지웠다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 대휘 역시 더 이상 우진에게 연락이 없었다. 대휘의 연락이라도 있다면 당장 달려 갈 텐데 우릴 내버려두라는 대휘의 말이 마치 이별 통보와도 같아서, 우진 저에게로부터 ...

- “알고 싶어. 나...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휘와 통화를 끊낸 우진은 제 손에 쥐어진 친자확인결과지를 들여다 보았다. <두 사람은 모자지간일 확률이 0.000011%입니다.> 이어 우진은 제 책상 위에 놓인 서울대 의대 동문명부에 실린 정석훈과 동기라는 96학번 윤수정의 사진을 내려다봤다. - 최근에 두 번이나 마주쳤소. 며칠 전엔...

말린 과일을 가지러 미연 대신 대휘가 근교 섬의 성당으로 간다는 말에 우진이 따라 나섰다. 3월이라 아직 바람은 찼지만 봄볕은 따뜻했고 햇빛을 받은 잔잔한 바닷물은 눈부시게 투명했고 오래전 폐업한 방직공장자리에 들어선 루인카페에 도착했을 때 대휘는 눈을 반짝이며 좋아했다. “우왕. 나 진짜 여기 가보고 싶었는데 형아가 어떻게 알았대?” “이 행님이 우리 휘...

- 검사님... - 이제 기억나네. 어쩐지 문변호사님 어디서 봤다 싶었지. 우진의 말에 승혁이 불리함을 느낀 승혁이 비굴한 표정으로 말했다. -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잘 모르는 사람인데 시비가 좀 붙어서...됐으니까. 가요. 방금 전 우진을 향해 비굴한 표정과 목소리로 말하던 승혁이 대휘에게는 큰 인심쓰듯 거칠게 쏘아붙였다. - 괜찮나? 우진에게 제 ...

“선생님 다녀올게요.” 빵을 만드느라 새벽 일찍부터 서둘렀다. 어느 순간부터 일주일에 한번 지검에서 주문한 빵은 대휘가 직접 가지고 들어갔다. “저 돌아와서 가게 문 열게요.” 방금 구워져 따뜻한 통호밀빵과 당근컵케잌, 단호박파운드케익과 수제 딸기 쨈을 바구니에 담아 차에 실으며 밝게 말하는 대휘는 룸미러를 내려 얼굴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어젯밤 자기 전...

- 한 달 전에 병원에 갔을 때 단순 위궤양이라고 하며 위궤양약을 처방해줬는데 얼마 후에 의식을 잃으셔서 응급실로 들어가니 갑자기 위암말기라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고 했더니 어떤 환자와 차트가 바뀌었대요. 이런 일이 종종 있다고. 병원에서 소동을 벌인 남자는 병원의 신뢰도 문제로 법적으로 시끄러워지는 걸 원하지않은 병원 측에서 고소를 하지 않는 대신 적극적...

시간이 늦어 갈 곳은 우진의 차 안 뿐이었다. 길을 잃어버린 들짐승들이 믿을 건 서로뿐이라는 듯 빈틈없이 깍지 낀 채 더 어쩌지 못하고 대휘를 바라만 봤다. 겨우 손깍지 낀 것 뿐인데도 너무 힘주면 가느다란 손가락이 부러질까 걱정돼 살짝 쥐었다가 그대로 제 손안에서 날아갈까 우진은 안절부절하면서도 이렇게 손을 맞잡은 이 시간이 더 할 나위 없이 소중했다. ...

장변과 승혁을 만난 후 우진은 조사에 박차를 가했다. 최초의 현장 출동 경찰이었던 최순경이 작성한 보고서를 본 우진은 부실한 증거물과 앞뒤가 안 맞는 등 미심쩍은 보고서에 무언가 있음을 직감했다. 가장 확실한 증거물인 차량 블랙박스의 파일은 누락됐고, CCTV자료는 화질이 안 좋아 증거물로서 불충분했고 차량 블랙박스에 찍힌 파일이 공유된 휴대폰 클라우드 확...

“이거 못 놔!!” 카페 안의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대휘는 우진이 이끄는대로 카페를 나왔다. 성큼성큼 앞만 바라보고 걷는 우진을 대휘는 거의 뛰다시피 쫓아갔다. 쫓아가며 몇 번이나 우진의 손아귀에서 빼내려고 몇 번이나 반항해봤지만 애초부터 우진의 힘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늘 이성이 앞서는 이 남자가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 대휘는 알 수 없어 속수무책으로...

이른 아침...낮게 소리죽여 우는 소리에 잠에서 깬 미연은 그 흐느끼는 소리의 주인공이 대휘라는 걸 알아챘다. 빵 만드는 이틀을 제외하면 카페도 열지 않아 바쁠 것 없는 일상이었다. 오늘은 어제 과일청까지 다 만들어두어 할 일이 없었고 밤새 대휘가 들어오지 않아 그러려니 했다. 스물 여섯 살 다 큰 성인이었고 이전에 일하던 직원도 빵 만들 때만 새벽부터 빵...

- 아이들이 상품을 가지고 계산대 밖을 나가는 걸 봤냐고요? 갑자기 들리는 사투리 섞인 표준말에 이제 다 됐다고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대휘 제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순간마다 나타난 우진이 존재만으로도 너무 반갑고 고마웠다. 그러나 우진은 대휘에게 시선도 주지않고 마트 직원과 지구대 경찰, 책사위에 놓인 하얀 봉투에만 집중했다. ...